[실버스톤브릿지 라벤더 아파트 1동 218호]
여느때처럼 수면캡슐에 잠을 청하던 도중 머리맡에 느껴지는 찬기운에 때이른 기상을 하게 되었을 때 우리집은 이전과는 많이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.
레드 라펜타의 힘이 이곳까지 미쳤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집 벽의 상당수가 붕괴해 있었고, 그 틈으로 찬바람이 쏟아지고 있었다. 심지어 마루 일부에는 눈까지 들어와 있었다. 집을 잃었다는 충격에 눈물이 나왔다.
우리집 메이드들도 당황했는지 고장나버린 온도 유지장치 주변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. 더 이상 울 때가 아니라고 판단한 나는 눈물을 닦고 부서져버린 집 바깥쪽으로 걸음을 옮겼다.
- 함부로 나가시면 위험합니다!
메이드의 경고를 무시하고 집을 나섰다.
바깥은 내가 예상했던 풍경이 아니었다. 단순히 눈밭만 펼쳐져 있을 거라는 판단과는 달리 사람이 있었기라도 한 듯 과일 등을 파는 선반과 한쪽에서는 따뜻한 스프가 담긴 냄비가 지글지글 끓고 있었다. 갑작스러운 온도 변화에 스프를 한 입 먹고 싶었지만 우선 이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라 생각했다.
한 때 시끌벅적했으리라 판단되는 시장에는 적막만이 흐르고 있었다.
성벽을 따라 이동하니 성의 크기에 어울리지 않는 성문이 눈앞에 있었다. 입구에는 알 수 없는 고대어로 쓰여진 팻말이 있었고 문은 열려있었다. 나는 망설임 없이 성의 안으로 들어갔다.
성 안은 생각보다 넓었다. 약물을 만드는 공방과 대장간, 약품 등을 쌓아놓은 공간이 한데 어우러져 있었고 가운데에는 점괘를 봐주는 듯한 구슬이 나를 맞이했다. 이 역시 방금 전에 사람이 살았던 듯 모든 물건들이 잘 진열되어 있었고 또한 사람의 손길이 닿아있었다. 나는 나 이외에 생존자를 찾기 위해 계속 찾아볼 수 밖에 없었다.
고성의 첨탑에는 방금 전 지핀 듯한 봉화가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. 이곳에도 분명 병사가 있었으리라... 대체 이 봉화는 어떤 이유로 지피게 되었을까? 왜 이곳에는 아무도 없는 것일까?
왕의 집무실에는 방금 전에 집무를 치르고 있던 듯 펜 깃에는 아직 촉촉한 잉크가 마르지 않고 있었다. 의자에 앉아 손을 대어보니 아직 온기가 남아있었다. 단순히 실내로 들어와서 느껴지는 온기일까, 아니면 여기 역시 사람이...?
부엌 또한 방금 전에 사람이 있었던 듯 여러가지가 활발히 작동되고 있었다. 갓 구운 빵을 보자 식욕이 생겼지만, 이곳에 있던 누군가'들'의 마지막 식사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흐르는 침을 닦고 다시 주변 조사를 실시했다.
식당의 의자에 앉아보았다. 여기 또한 누군가 앉아있던 공간인 듯 체온이 느껴졌다. 아무래도 이곳은 더 이상 아무도 살지 않는 것 같다.
누군가, 실수로 이 공간에 접속하게 된다면, 나를 대신해서 사람을 찾아주길 바란다. 작동되지 않는 활동머신과 온도유지장치, 공간이동 엘리베이터를 버려둔 채 나는 이제 중세풍의 성에서 살아야 할 지도 모른다. 더 이상 나를 따뜻하게 맞이해주지 못하는 나의 집에서...